인문

운칠기삼

더큰돌 2025. 8. 20. 09:32

“운칠기삼(運七技三).”

옛사람들은 인생의 성패가 칠할은 운에, 삼할은 기(技)에 달린다고 보았다. 어찌 보면 허무한 말 같지만, 오래 살아보면 이 속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뜻하지 않은 바람 앞에 무너지고, 반대로 별 볼 일 없는 배경이 우연한 기회와 만나 한 시대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 ‘운’이란 무엇인가?

고대 부족사회에서 운은 곧 혈연과 부족이라는 안전망이었다. 같은 피를 나눈 자들, 같은 마을에 뿌리내린 사람들끼리 서로를 지켜주는 일종의 생존보험이자 신뢰의 기반이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현대사회에 이르러서도 그 구조는 여전히 작동한다. 지연, 학연, 혈연—겉으로는 사라진 듯하지만, 우리가 올라가려는 사회적 사다리의 상층부로 갈수록 더욱 선명해진다.

기업의 고위 임원 인사나 공공기관의 권력 지도를 들여다보면, 특정 학교·특정 지역 출신이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한 집단의 본능적 선택, 곧 “알려진 배경에 의지하는 구조적 기제”다. 역설적이게도 개인의 실력과 성취가 강조될수록, 그 배경과 연줄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 현대판 카스트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이 현상은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에는 ‘올드 보이 네트워크(Old Boys Network)’라는 말이 있다. 하버드·예일·프린스턴 출신들이 정계·법조계·금융계를 장악하는 관행이 오래도록 이어져 왔다. 영국의 옥스브리지, 일본의 동대, 인도의 카스트 잔재, 중국의 태자당(太子黨) 등—문화와 제도가 달라도 인간은 불확실성 앞에서 “배경”이라는 안전한 틀에 기댄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노력이 무력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아니다. 바로 여기서 철학적 긴장이 발생한다. 사회적 구조는 개인의 의지를 가로막지만, 동시에 개인의 의지가 그 구조를 흔드는 사례 역시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다. 운은 고정된 외부 조건이 아니라, 노력과 만나면서 새로운 궤적을 만들어낸다. 불운을 탓하며 멈춰 서면 운은 벽이 되지만, 불운을 뚫고 나아가려는 의지 위에서는 운조차 길이 된다.

결국 운칠기삼이라는 말은, 운과 노력이 대립한다는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이 사회적 구조라는 거대한 운명과, 그 속에서 발휘하는 개인의 의지 사이에서 늘 긴장 속에 살아간다는 고백이다. 우리는 이 긴장을 피해갈 수 없다. 다만 그 안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불운을 탓하며 멈추는 순간 운은 적이 되고, 불운을 껴안고 길을 모색할 때 그것은 다시 운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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