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 가운데 어두운 면만을 도려내 부각시킨 것이 ‘악’이라면, 그것은 실체라기보다는 현상에 가깝다. 상황과 맥락, 환경과 조건에 따라 드러나거나 감춰지는 어떤 성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악은 늘 우리 안에 있는 것이며, 우리 밖에도 있는 것이다.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오래된 통찰은 수많은 문학작품에서, 또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 속에서도 끊임없이 확인된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 다르다.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처럼 악이 실체로 태어난다는 서사가 점점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어떤 사람은 유전자와 뇌의 구조부터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하고, 죄책감 없이 악행을 반복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악한 본성을 타고난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물음에 섣불리 단정 짓고 싶지 않다. 악은 태어날 수도, 길러질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정확히 식별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어떤 말과 행동이 있다면, 그것이 선한지 악한지를 판단하는 일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표면적인 말과 행동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맥락이 중요하고, 그 이면의 동기와 배경, 그리고 그 말과 행동이 불러온 결과까지 살펴야 비로소 윤곽이 드러난다.
요즘처럼 어떤 사람의 태도나 감정만을 보고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라는 딱지를 손쉽게 붙이는 사회는 오히려 또 다른 악을 낳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결핍을 악으로 단정하고, 이해보다는 격리와 처벌로 반응하는 태도—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악을 대하는 방식이 악해지는 순간이 아닐까.
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나에게는 이 질문에 확답을 내릴 능력이 없다. 다만 나는 경계하고 싶다. 악을 너무 쉽게 가리키고, 너무 손쉽게 낙인찍으며, 때로는 그것을 정당화하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그래서 나는 이렇게 믿고 싶다. 악은 어쩌면 우리가 외면했거나 무지했던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악을 이해하려는 태도와 악으로부터 멀어지려는 태도 사이에서 고민할 수 있는 존재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