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에 관하여, 나의 방식으로
나이를 좀 먹으면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노후 준비는 잘 되고 있나요?”
어떤 대답이 적당할까. 딱히 정답이 있는 질문은 아니다. 노후라는 말에는 삶의 마지막 장을 둘러싼 수많은 문제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다. 건강, 돈, 외로움, 죽음, 그리고 그 너머까지. 그러나 질문의 뉘앙스를 보아하니 대부분 ‘경제적 준비’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답하곤 한다.
“별문제 없어요.”
그리고 곁들여 말한다.
“나는 씀씀이가 크지 않아요. 신선한 공기와 약간의 식량만 있다면, 은퇴 후의 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아요. 물론 예기치 못한 큰 병 같은 건 어쩔 수 없겠죠. 그런 건 운명 아닐까요? 하하.”
몇 살에 은퇴할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사실이다. 은퇴 전의 생활 수준을 은퇴 후에도 그대로 유지하려는 욕망—그건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골프 같은 고비용 스포츠, 체면을 위한 모임, 각종 경조사에 얽힌 의무들… 흔히 ‘사회생활’이라 부르는 활동들. 나는 그것들을 일종의 사치로 본다.
삶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결국 개인의 성향일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검소한 쪽에 속한다. 그래서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인간관계도 서서히 줄여나갈 생각이다. 그리고 남은 시간에는, 남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지 사색할 것이다. 조금 느리게 걷고, 조금 덜 가지며, 그러나 더 깊이 있게 살아가려 한다.
그 정도면, 나로서는 충분하다.

느린 시간을 위한 여정
언제 은퇴할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예감은 있다. 예전에는 ‘은퇴’라는 단어 자체가 삶의 단절처럼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저 ‘다른 삶의 시작’으로 받아들인다. 마치 직선으로 흐르던 강이 어느 순간부터는 곡선을 그리며 흐르듯, 삶의 궤적이 조금 달라질 뿐이다.
은퇴 후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사람들은 흔히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초점을 둔다. 여행, 봉사, 취미, 손주 돌보기, 혹은 제2의 직업 같은 것들. 물론 그런 활동들도 소중하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는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빠르게 달리던 삶에서 잠시 멈추어, 내 안에 고인 시간들을 바라보는 일. 그동안 놓쳤던 계절의 변화, 사람의 표정, 흙냄새와 바람 소리 같은 것을 다시 느껴보는 일. 그런 느린 감각을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은퇴 후의 삶에서 가장 근본적인 치유일지도 모른다.
이따금,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젊은 날의 고집, 치열했던 선택들, 뜻하지 않게 얻게 된 작은 기쁨들. 그 모든 조각들이 하나의 긴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이야기를 남기고 싶다. 자식에게가 아니더라도, 나 자신에게라도. 기억을 문장으로 정리하다 보면, 내가 누구였고 무엇을 소중히 여겼는지 선명해질 것 같다. 아마도 그 기록은 내 삶의 마지막 선물이 될 것이다.
또한 나는 인간관계의 물살도 조금은 줄일 생각이다. 억지로 이어가는 관계보다는 서로 조용히 응시할 수 있는 몇 사람만 곁에 두고 싶다. 대신 자연과 더 가까워지고 싶다. 나무 그늘에 앉아 하루를 보내거나, 해 지는 들판을 바라보며 사색하는 그런 날들.
결국 은퇴 후의 삶은 무엇을 ‘더 가지는가’보다
무엇을 ‘덜 욕망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세상의 중심에서 한 발 비켜나, 중심이 없는 세계의 고요함을 배워가는 시간.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조금은 더 단순하게, 그러나 조금은 더 진실하게 살아가고 싶다.
그것이 내가 그려보는 ‘은퇴 후의 삶’이다.
느린 시간의 품격을 지키며, 마지막까지 나답게 존재하는 삶.

남겨두는 것들에 대하여
나이가 들수록 ‘무엇을 더 가질 것인가’보다 ‘무엇을 남겨둘 것인가’에 마음이 간다.
그러나 무엇을 남긴다는 것은 그저 유산 목록을 정리하는 일은 아니다. 그것은 내 삶을 통과해온 감정과 선택, 생각과 신념들을 한 올씩 풀어 다시 짜는 일이다.
나는 자녀에게 많은 것을 물려주려 하지 않는다.
집 한 채, 통장 몇 개, 보험 증서 같은 것들은 물론 필요하겠지만, 그것들이 삶의 무게를 오래 떠받쳐주지는 못한다. 내가 진심으로 물려주고 싶은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지탱해주는 방식, 고난을 견디는 태도, 세상을 해석하는 눈이다.
물론 이런 소통은 쉽지 않다. 스스로 쌓아 가야만 하는 영역이기도 하고 말이다.
앞으로 그들이 살아갈 세상은 내가 지나온 수십 년보다 훨씬 더 불확실할지도 모른다.
기후와 자원, 기술과 노동, 정치와 공동체의 질서까지도 모두 불안정하다. 우리가 익숙했던 것들이 더는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토록 예측 불가능한 시대에 살아갈 아이들에게, 단단한 아파트보다는 단단한 내면의 기반을 전해주고 싶은 것이다.
그 내면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그 답을 ‘경험에서 얻은 지혜’에서 찾는다.
크게 다치기도 하고, 뜻밖의 배신을 당하기도 하며, 오해받고 주저앉기도 했던 수많은 순간들. 그러나 그런 경험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고, 내가 삶을 대하는 방식도 그 안에서 정립되어 왔다. 나는 내 자녀도 그런 경험을 통해 자기만의 언어와 시선을 갖기를 바란다.
물론 자식에게 모든 고통을 미리 가르칠 수는 없다. 삶이란 결국 각자 걸어야 하는 고유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내가 배운 것, 내가 겪은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얻은 통찰을 진심으로 나눌 수는 있다.
때로는 말로, 때로는 글로, 혹은 함께한 풍경 하나로라도.
나는 이제 느리게 걷고 있다. 하지만 그 느림 속에서,
누군가의 시간을 덜 외롭게 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내가 남기고 싶은 것은
어떤 시대에도 유효할 삶의 감각이다.
조금은 단단하고,
조금은 유연하며,
무엇보다 진실한 마음 하나.
이것이 내가 자녀에게 남기고 싶은 ‘진짜 유산’이다.

죽음 이후를 생각하는 법
서양에는 오래된 문장이 하나 있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다소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곱씹을수록, 그것은 두려움이 아닌 권유처럼 들린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건 곧, 더 충실하게 살아가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삶은 유한하지만, 그 유한함 덕분에 우리는 오늘 하루를 소중히 여긴다.
시간이 끝난다는 걸 알기에, 우리는 지금의 대화를 아끼고, 작은 친절 하나에도 마음이 움직인다.
만약 죽지 않는다면, 삶은 오히려 무의미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는다는 것은 정말 끝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내 몸은 사라지겠지만, 나의 말은 남고, 나의 방식은 누군가의 몸짓에 깃들고, 나의 사랑은 또 다른 형태로 이어진다.
아이를 키우며 전한 말투 하나, 음식에 넣는 소금 한 꼬집의 습관, 어느 순간 내게 했던 고민의 태도들…
그 모든 것이 이어진다. 내가 가고 난 뒤에도.
어쩌면 인간은 단독의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담고, 서로를 건너 이어진다. 세대를 넘어, 시간의 강을 따라 흐른다.
죽음은 그렇게 봤을 때, 삶의 멈춤이 아니라 전달의 순간이다.
내가 지켜온 것, 품어온 것, 걸러낸 것들을 다음 세대에 건네는 일.
그것이 내가 죽음 앞에서 두려움 대신, 고요한 책임감을 느끼는 이유다.
누군가는 이 모든 것을 ‘영생’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그 영생은 개인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온 이들의 삶을 통해 이어지는 영속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준비하고 싶다.
삶을 정리하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물 흐르듯 다음 세대에게 나를 건네주는 일.
그러니 지금 이 순간도 소중하다.
남은 하루, 남은 계절, 남은 인연을 어떻게 보낼지를 생각하게 된다.
죽음을 기억하되, 죽음에 갇히지 않는 삶.
그런 삶을 나는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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