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억, 그리고 빚
90년대 어느 날, 적금이 만기가 되어 통장에 제법 큰 금액이 들어왔다. 조심스레 계획했던 돈이었지만, 뜻밖에도 평소 알고 지내던 직장 동료가 급히 2개월만 빌려달라고 했다. 당시엔 서로 간에 신뢰가 있었고, 특별한 의심 없이 입금해주었다.
하지만 약속한 날짜가 지나도 그는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 계속 미루기만 하던 중, 나는 다른 동료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었고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그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주식 투자에 실패했고, 여기저기서 돈을 돌려막으며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심각해지고 동료들 사이에서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나는 우여곡절 끝에 내 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아마도 또 다른 누군가의 돈으로 내 빚을 갚았겠지. 그 후 그는 회사를 그만두었고, 그의 이름은 동료들 사이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그 일이 특별했던 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된 것은, 유사한 일이 다른 사업부에서도 반복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급여가 차압당했다는 소문, 돌려막기 하다가 사라진 직원, 조용히 사직한 동료들… 회사 안팎으로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북으로 넘어가다 변을 당한 공무원의 뉴스에서 ‘빚’이라는 단어가 등장했을 때, 문득 그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모든 사건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원인이 있다. 삶이 무너지는 소리는 조용히, 아주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된다.
옛 어른들 말씀처럼,
“빚은 지는 게 아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에게는 더더욱.”
신뢰는 돈으로 시작하지 않지만,
무너질 때는 언제나 돈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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